기차를 타고 병원에 갈 일이 있던 지난 달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표를 끊고 탄 기차는 만원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발렌시아를 벗어나 다른 도시에 학교와 직장을 두고 등교, 출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적북적한 기차는 역시나 살이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포츠 웨어를 입은 한 건장한 남자가 조그만 쪽지를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역에서 많이 본 풍경이었지요. 쪽지를 돌리거나 물건을 얹혀놓고 은근히 사라는 태도의 그런 풍경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묵묵히 쪽지를 돌리고 걷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경제가 악화되어 많은 사람이 실업자 신세가 되어 어려운 형편에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기차 안에서 이런 구걸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쪽지는 제 무릎 위에도 왔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 쪽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가장입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 이 가장이 이렇게 구걸하는 부끄러운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일을 찾을 수 없어 이런 구걸을 하게 된 점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구걸하는 이유는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입니다. 도움을 조금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남자를 쳐다봤습니다. 그제야 왜 저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머뭇머뭇하면서 쪽지를 돌리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물론 저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혹은 일부러 저런 짓해서 돈 버는 사람은 아닐까? 순간 의심도 갔지만, 저는 사람에 대한 인상을 믿는 사람이라 이 사람에게 5유로를 건냈습니다. 그 남자는 순간 흔들리는 눈으로 제 눈을 보더군요. 그 눈에서 감사의 의미를 읽고 저도 참 안심이 되었답니다. 이 사람에게 나의 5유로가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말이지요.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본 많은 풍경 중에 이런 구걸에 대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가 인도에서 살 때는 '박쉬시!' 하며 요구하는 아이들을 참 많이 만났답니다. 관광객 상대로 졸졸 쫓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아이들이 귀찮을 때가 참 많았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처님이 열반하신 사르나트라는 동네에서 전 조용히 앉아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가나 네히 해!(먹을 게 없어!)"
제가 일부러 아이들에게 먹을 게 없다면서 배 고픈 표정을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깔깔깔 웃으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제게 한두 푼 모아 주더군요. 한국 돈으로 치자면 단돈 1원 짜리를 말입니다.
"요 녀석들! 너희들 지금 학교 가야 하는 것 아니야?"
어눌한 힌디로 아이들을 꾸짖었더니, 아이들은 깔깔깔 또 웃으면서 제게 그러더군요.
"학교 갔다 왔어요."
그렇다면 요 녀석들이 부업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이런 계기로 아이들과 인연이 되어 여러 번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에게 구걸은 자존심 팽개쳐버리고 구원하는 손길이고, 어떤 이에게는 습관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비스타베야 페냐골로사에도 한 명의 노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칭, '페냐골로사 성산의 은든자'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그 은둔자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움을 요청한 기차의 그 아빠와는 다르게 삶을 삽니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는 도시의 노숙자와 다름없습니다. 스스로 미화하는 것을 비판하는 겁니다. 노숙자라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 은둔자는 자연공원 내의 대비용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비용 장작을 다 써버리고, 혹여, 등산객이 그곳에 머무르기라도 하면, 먹을 것을 나눠 달라 부탁하고, 담배를 달라 압력하고, 돈이 있으면 도와달라 부탁을 합니다. 매번 그곳을 다녀오면 그는 멀쩡한 차림에 이런 구걸이 습관이 되어 행동하는 모습을 보니 뻔뻔해보이기도 했습니다.
페냐골로사 성산의 은둔자는 도시에서 구걸하는 아빠보다 더 부끄럽게 보였습니다.
자신을 미화하여 방문객을 현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물건인 양 모든 대비용 음식과 구호물품을 차지해버려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비용 건물에 들어온 방문객을 나가버리게 할 정도의 냄새를 풍기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더군요. 이것도 민폐라고 봅니다. 공공장소에서의 점령이 과연 은둔자로서 해야 할 모습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뻔뻔함을 얼굴에 씌우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다 팽개쳐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말 뻔뻔하게 구걸을 일상으로 삼고 있어, 지나가는 마을 사람에게 옷을 빨아달라느니, 음식을 해달라느니, 요구를 끊임없이 합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노숙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구걸하는 아빠......
오늘은 소소한 생각을 해봤네요. 세상살이 다 묘하구나 싶습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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